글|백곤, 미학
화가 박상희는 시트지 작가라는 호칭이 따라붙을 정도로 시트지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여 왔다. 아마도 그녀는 근 10년 동안 시트지 컷팅의 회화적 활용에 대해 연구한 것 같다. 시트지 사용과 관련하여 같은 질문을 오랫동안 들어왔을 터인데 그녀는 쉽게 지치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의 작품에 대한 궁금증은 하나로 정리된다. ‘작가 박상희에게 시트지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학창시절 간판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일까? 아님 한번 사용한 매체에 대한 애정, 혹은 작품의 아이콘화일까? 그것도 아니면 값비싼 재료의 구매 능력에 대한 불안함? 이러저러한 추측들에도 쉽게 답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도대체 시트지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녀가 작품의 소재로 선택한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접착 시트지는 한국의 간판문화를 이끄는 일등 항해사로 현란함과 유치함을 대중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그녀가 캔버스에 싸구려 시트지를 갖다 붙이고 칼로 요리를 하기 시작한 이유에는 분명 현대사회, 특히 한국 간판문화에 대한 작가의 철학이 적잖게 작용했을 것이다. 2004년 전시 ‘간판은 아트다’에서 보인 작품들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도출해 볼 수 있었다. ‘시트지 간판천국의 도시, 한국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이러한 직접적인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간판이라는 문화가 내포하고 있는 그 사회의 국민성, 혹은 정신성을 부드러운 도시풍경으로 보여준다. 우리사회의 흉물스럽지만 현란한 간판문화는 배척하고 부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역사이자 우리자신들의 모습임을 조용히 환기시켜준다. 그렇다면 그 문화안에는 과연 어떠한 생각들이 자리하고 있을까? 자! 지금부터 작가 박상희가 말하는 시트지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 붙이고, 오리고, 그리다
박상희는 캔버스의 배경색을 정하고 2~3겹의 시트지를 그 위에 붙인다. 그런 다음 그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대상을 표현한다. 작품제작의 과정은 ‘붙이고, 오리고, 그리다’로 정리된다. 그녀는 전통회화의 평면성 위에 시트지를 활용한 부조의 표현으로 공판화와 같은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표면은 회화의 원근과 더불어 부조의 마티에르를 가진다. 이러한 조각적 마티에르, 즉 표면의 울퉁불퉁함은 작품에 생동감을 더해준다. 그녀가 도시의 풍경, 특히 도시빌딩들에 붙어 있는 간판들의 현란함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사용한 시트지의 다중 겹침은 엠보싱의 효과를 내며, 이는 평면에 요철을 주어 리듬감을 조성한다. 그리하여 관람자의 시선을 캔버스에 오랫동안 머물게 한다. 그녀는 이러한 효과를 ‘촉각적 관심’이라고 부른다. 관객들은 캔버스 표면의 요철을 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적 촉각성은 화면에 재미를 가져다준다. 물론 이러한 효과를 위해서 작가는 손으로 시트지를 한 겹 한 겹 정성들여 붙이고 오린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꼴라주의 개념을 넘어선다. 시트지를 칼로 오리는 행위에는 건물의 외곽을 오린다거나 그림자를 오려내 입체적 효과를 준다거나 하는 일정의 규칙이 없다. 오려짐은 회화의 그려짐과 상관없이 새로운 층에서 행해진다. 파편성, 즉 그녀에게 오린다는 것은 결과를 알 수 없는 행위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그녀가 시트지를 애써 캔버스에 붙인 다음 제멋대로 오리는 것일까? 물론 그것이 그려진 평면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결국에는 그려짐과 오려짐의 조합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녀의 초감각적인 감정, 혹은 정신적 구성력으로 오려지는 시트지의 음각 중첩은 캔버스에 맺혀지는 상(이미지)과 관련이 있다. 그녀는 캔버스에 표현되는 이미지를 파편화된 의미로 해석한다. 그것은 디지털 이미지와 흡사한데, 인간의 양안적인 자연스러운 눈이 아니라 캔버스를 잘게 쪼개고 픽셀화시켜 하나의 구성요소로 파악하는 광학적인 눈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눈이 하나의 대상에 초점이 맞춰지는 반면, 디지털화 된 픽셀은 모든 주변의 이미지들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즉, 디지털 이미지는 주/부가 없이 모든 것들이 제각기 살아 움직인다. 박상희는 바로 이러한 이미지에 관심이 있다. 파편화되고 흩어지면서도 모두가 생명력을 가지는 디지털 이미지의 표현, 바로 그 표현을 작가는 시트지의 이중 삼중 레이어를 통해 캔버스로 옮겨놓는다. 다시 물음은 시작된다. 왜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를 강조하는가? 작가는 현대 한국의 도시문화, 특히 빌딩의 외관에 현란하게 붙어져 있는 간판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그녀가 회화의 원근을 고집하면서도 디지털 픽셀의 파편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작품의 내적인 이야기를 살펴보면 조금 더 상세히 알 수 있다.
- 회화로 표현된 일상성
도시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살펴보면,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의 도시가 명확히 구분된다. 오래된 역사위에 세워진 문화적 도시와 계획된 신도시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강북의 도시는 생성과 소멸의 현상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반면, 강남의 도시는 단계적으로 생명성을 부여받았다. 서울 외 위성도시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각 도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고층빌딩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간판들의 풍경은 비슷비슷하다. 그 간판들은 형형색색 자신들의 색깔을 드러내기 바쁘다. 작가 박상희가 처음 간판의 소재인 시트지를 차용한 이유에는 바로 한국의 도시문화를 결정짓는 중심에 싸구려 시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페허속에서 세워진 지난 몇 십년간의 도시의 생명을 다시금 없음으로 만드는 성장 중심의 도시계획은 전통과 문화라는 시대성을 무시하고 싸구려 시트지 천국으로 사람들을 내몰았다. 하지만 작가는 그 시대성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시트지 간판의 싸구려 문화에서 우리들의 지나온 과거와 현재성을 포착하는 작가는 직접적으로 대상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는 자신의 이러한 예술적 태도를 바로 ‘일상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애써 포장하지 않고, 지금 현재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일상이다. 물론 많은 작가들이 도시의 풍경을 통해 일상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래서인지 일상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도시풍경이 생각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소소한 것, 반복적인 것, 특별하지 않은 것이 일상이라 일컬어 질 때 거기엔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에 대한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일상의 의미가 회화의 영역에 들어왔을 때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회화에서의 ‘일상성’은 사진과 같이 단순히 일상의 풍경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상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환기시키는 의미로 작용한다. 바로 이것이 박상희가 말하는 일상성이다. 짬뽕된 한국도시의 몰개성, 혹은 과개성의 풍경을 일상이라는 풍경을 통해 다시 들여다보게끔 한다. 즉, 조각적 마티에르를 통해 이루어진 현란한 간판의 세계를 정신없이 느끼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왜냐하면 작품의 감상엔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화에서의 조각적 표현은 작품을 감상하는 의미의 다중화에 관계한다. 화면에 표현된 간판의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면서 자신의 삶 주변의 풍경들을 떠올리고, 그 풍경과 관련된 개인사를 기억하게 하는 서정성을 통해 대상은 재해석된다. 이처럼 시대의 역사와 개인사를 함께 내포하고 있는 도시의 간판을 촉각적으로 만지게끔 만드는 작가의 감성은 회화의 원근과 평면성의 겹쳐짐을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만든다. 그것은 마치 디지털 사회의 파편화된 개별성과 아날로그적인 내러티브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이 시대의 정신적인 풍경과도 같다.
- 회화의 재현과 빛
작가 박상희의 작품은 재현과 평면 사이에서 행해지는 끊임없는 실험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려짐의 실험이 조각적 요철을 가짐과 동시에 일종의 패턴처럼 추상성을 가진다는 점에 더욱 의미가 있다. 재현과 추상적 패턴이 만나면서 하나의 회화적 이미지를 생산해낸다. 그러한 회화적 재현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빛이다. 박상희는 이제 화면을 구성하는 빛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녀의 최근작은 도시의 밤 풍경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그 밤 풍경엔 빛이 있다. 물론 그 빛은 도시의 가로등과 자동차, 건물의 간판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적인 빛이다. 그녀에게 도시의 불빛은 간판처럼 연구해야 할 새로운 과제이다. 왜냐하면 그 빛은 소실원근법을 가능하게 하는 태양의 강렬한 빛과 구분되는 정서적인 빛이기 때문이다. 인공적인 빛은 각각이 가지는 색상과 조도를 가진다. 그리고 빛의 색상 및 강도는 그 도시문화를 대변한다. 작가 박상희의 ‘일상성’은 밤을 밝히는 인공적인 빛과 그 빛을 받아들이는 도시풍경으로 옮겨진다. 또한 그녀가 오랫동안 관찰하였던 한국의 일상성을 벗어나 다른 나라의 도시풍경을 화폭에 담는다. 그녀가 말하듯 인공적인 빛에는 그 빛을 해석하는 문화적 정서가 담겨져 있다. 그 빛은 한국의 간판문화처럼 민족성과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척도로 사용될 수 있다.
이제 작가에게 시트지의 질료적인 의미는 무의미해진다. 그것은 시트지여도 되고 아니어도 된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밤을 화려하게 밝히는 빛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과 그 빛을 파편적으로 잘게 부수어 화면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녀는 재현과 평면, 빛의 의미를 분석, 실험하면서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내기를 희망한다. 그 풍경에서 우리는 문화적 특성을 발견하며, 시대의 ‘일상’과 나 개인의 ‘일상’을 재확인한다. 물론 그것은 아름다운, 혹은 어지러운 그녀의 회화에서 느껴지는 감성이다. 그리하여 화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도시문화의 다양성은 시트지의 층처럼 두껍거나 가볍게, 혹은 집중되거나 파편화 된다.
간판을 구성하는 삼요소를 시트지, 컷팅(오림), 빛의 사용으로 볼 수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박상희 작품의 주요 구성요소와 비슷하다는 점이 참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