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일상 삶의 궤적

김성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

 

‘일상(日常)’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인간이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반복되는 생활을 말한다. 말하자면 특별하지 않은 항상성과 반복성을 지니는 모습, 습관, 행동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따지고 보면 너무도 상식적 삶의 패턴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변함없는 일상적인 삶의 궤적도 시간이란 함수가 작용하게 되면 흐르는 강물처럼 단순한 반복으로 끝나지 않고 고도의 발달해가는 산업사회의 배경과 함께 나름의 잔형을 남기게 된다. 마치 강물이 흐르지만 물줄기는 주변 지형에 따라 긴 궤적을 남기는 것처럼 일상적인 삶도 하루하루의 축적을 통해 시대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상성은 그 사회가 지닌 특성을 이해하고 사회전체 패러다임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척도적 의미를 지닌다.

 

바로 이러한 시간과 인간의 삶의 네트워크에 눈을 돌린 평범한 눈을 지닌 유별난 작가가 바로 박성희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녀는 작업일기에 ‘한국 사회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풍경을 중점적으로 다루어독특한 회화의 일루젼을 보여주고 싶었다………그림 속 대로변이나 동네풍경은 오랜 시간 삶의 깊이와 축적된 특별한 공기를 머금는다. 때로는 그 삶의 애착이 지나쳐, 비인간적인 흉물로 개발될 때도 있지만 우리를 형성하는 공간이자 곧 내가 받아 들여야 할 삶의 근원이라고 생각된다.’라고 말했듯이 그녀는 도시의 삶속에 자리하고 있는 문화의 모습을 박상희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소박하게 도시의 일상을 이미지화 하고 있다. 우선 그녀가 작업의 소재로 선택한 일상적인 것들, 도로, 전봇대, 골목풍경, 건물의 간판들, 이러한 소재는 작품소재로 보기에 너무나 평범하고 지저분한 이미지를 지닌 것들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관심하게 흘려보내는 것들이 우리들의 삶과 매우 밀접한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바라 본 것이다. 평범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애착, 이러한 작가의 눈을 가진 그녀의 작품은 동시대적인 현실을 솔직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많은 작가들이 현대사회를 불확실성과 불안감으로 바라본 것과 달리 담담한 시각으로 자신의 삶과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미술 화단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녀가 다루고 있는 일상성 ,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이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일상의 의미는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예술작품에서는 달라질 수 있다고 함으로서 그 중요성에 대해 말한바 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좀 더 발전시켜 일상은 다른 모든 것이 변한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생명력을 지니는 존재로 본 것이다. 말하자면 바르트적 사고로 본다면 어떠한 문화도 일상의 바탕 없이는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바르트는 모든 예술분야에 나타나는 일상성에 대한 묘사는 소비적, 추상적인 즐거움 대신 생산적, 구체적인 즐거움이 창출되는 공간이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살아남는 것은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바로 이런 개별적인 사람들에게서 우러나온 세부적인 것, 삶의 반복적인 양상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상희의 시각은 우리에게 매우 따뜻한 시각으로 다가온다. 특히 매일 반복되는 도시의 일상생활에서 극도의 권태와 피로를 느끼면서 일상성에서 혹시 벗어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깊은 위로를 주고 있다. 그녀는 작가 일기에서 ‘그림 속 대로변이나 동네풍경은 오랜 시간 삶의 깊이와 축적된 특별한 공기를 머금는다. 때로는 그 삶의 애착이 지나쳐, 비인간적인 흉물로 개발될 때도 있지만 우리를 형성하는 공간이자 곧 내가 받아 들여야 할 삶의 근원이라고 생각된다. 높이 쌓여진 축대나 기울어진 전봇대, 마구 붙여진 전단지등 공공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개인적인 시각과 감성으로 다시 옷 입히려고 하였다’고 밝힌 바 와 같이 일상성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근원임을 그리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작품은 자신의 삶 속에서 우러난 탄탄한 사고와 철학적인 토대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일상의 모습을 그녀는 시트작업을 통해 현대도시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즉 건물 사이길, 화려한 사인보드로 메워진 상가들, 화려하지만 싸구려 간판들, 대도시의 뒤안길 등을 소재로 다루고 있는 그녀는 현대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지저분한 뒷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도시의 속성을 그녀는 레이어를 설정하여 너무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건축법 도시계획법등과 같은 법질서와 인간의 욕망이라는 틀이 함께 빚어낸 도시라는 큰 틀 속에서 각개의 건물과 도로 골목 간판 등은 얼핏 보면 서로의 관계들이 통합되지 않은 듯 보이는 이러한 도시의 모습을 그녀는 일상이라는 차원에서 모두 수용하고 있다. 그녀는 규격화되고 획일화된 도시의 일상성을 자신만의 감각으로 정감어린 표현으로, 시간을 되새기게 하는 장소성을 지닌 곳으로 재생하고 있다. 도시의 재생 바로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이 머무는 곳, 바로 이것을 표현하려고 그녀는 시트지를 사용한 남다른 표현기법을 사용했던 셈이다.

공해와 임금착취에 찌들은 근대도시와 달리 현대사회는 후기산업사회의 최소한의 노동력으로 최대한의 효과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이 물질적 풍요는 일상적인 개념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도시 속의 일상은 더 이상 존재의 벽에 대한 개인의 한계상황이 아니라 공동체에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적 여유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그러한 일상성을 말한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화두인 일상성은 바로 자신의 존재방식과 가치에 대한 발견으로 볼 수 있으므로 도시의 풍경은 바로 소재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이미지와 일상성의 등가가치관계로 재해석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일상의 속성과 의미에 대하여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91)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대정신으로써 일상성에 주목한 바 있다. 그는 일상성을 소비가 극대화된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일상의 도구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현대세계의 일사성은 이상적인 인간의 행위와는 거리가 있는 시대적 성격으로 자본주의사회의 현대성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다. 산업과 자본주의사회의 발달로 달라진 사회의 성격, 바로 일상의 개념차이를 상상과 이미지의 세계를 통해 다시 한번 실감나게 느끼게 된다.

 

이렇듯 박상희는 작품을 통해 개인의 체험적인 삶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담아낸 도시의 풍경은 소재와 이미지의 단순한 서술이 아닌 작가의 독자적인 시선으로 시대를 읽고 해석함으로서 자신의 음유하고자 하는 시대 모습을 서사적인 표현으로 그려내고 있다. 작가 박상희는 자신이 선택한 소재들,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팝아트적인 현대소비사회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그녀가 보여주는 작업은 마치 느긋하고 천천히 돌아가는 화면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것은 대다수 팝아트들이 보여주고 있는 요소와 매우 색다른 감성이라 생각된다. 특히 그녀는 주로 광고용 시트지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재료는 일시적이며 강렬한 색채로 인간의 시선을 찰나적으로 잡아내는데 효과적이므로 광고물에 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녀는 이러한 재료적 특성을 누르고 찰나적인 시선이 아닌 매우 느린 속도의, 오히려 회화보다 더 느린 속도의 장면을 연출시킨다. 그녀의 시트 컷팅은 다분히 회화적이고 오히려 회화의 붓이 지니는 시간성을 넘어서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많은 젊은 작가들이 화려한 색채의 시트지를 주로 기계를 이용한 컷팅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데 반해 이 작가는 붓 대신 칼을 쥐고 직접 화면을 컷팅해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그린 거리의 풍경은 그 대상을 사실 그대로 그리는 정말 잘 그림 그림이라기보다는 나의 정서로 새롭게 오려지고 뜯어지면서 새로운 시간의 덧씌우기를 한 것이다.’ 라고 작업일기에서 언급했드시 그녀는 작가주변의 일상적 이미지를 시트 컷팅을 통해서 그녀의 새로운 시선으로 덧씌우기를 함으로서 또 다른 새로운 시간여행을 유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은 예술을 통해서 제한된 ‘나’를 공동체적 존재와 통합시키고, 그 개발성을 사회적인 것으로 만들기를 열망하며, 잠재적으로 그 자신의 것이 될지도 모르는 타인의 경험을 소유해야만 전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느낀다. 예술은 개별적인 것을 전체적인 것과 통합시키는데 없어서는 안 될 인간만이 지닌 의외의 수단이다. 때문에 이것은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 경험과 생각을 공유 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반영한다. 즉, 예술은 일상생활 속에서 사회적 재생산을 통해 개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처럼 개인의 예술적 행위가 곧 사회적 존재임을 나타내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측면에서 작가 박상희는 현대도시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눈으로시트지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일상의 소리를 듣고, 일상의 색을 보며, 일상의 질감을 느껴지는 그녀의 감각은 범속을 넘어 새로운 미의 세계를 향해 자신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그녀는 보기 드물게 남의 이야기를 엿듣거나 글을 훔치지 않고 소소한 일상 속에서 자신의 삶과 경험을 사색으로 의미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그리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자생적 뿌리가 깊은 작가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소박함으로 그녀는 현대도시와 우리들의 개별적인 삶이 추구해야할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소통의 장을 열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