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희의 회화
빛 갑옷을 입은 도시의 피부를 찢어라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그리기와 만들기, 회화적 프로세스와 공작적 프로세스. 박상희는 시트지로 그림을 그린다. 시트지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으므로 엄밀하게는 시트지로 그림을 만든다. 시트지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이중삼중으로 덧입힌 시트지를 칼로 오려내 시트지 위에 그린 그림이 부분적으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그림을 만들기도 한다. 그림을 그리고 만드는 과정이 일관성을 가지고 수행되기도 하고 과정 속에서 일관성이 뒤집어지기도 한다. 그림을 그리고 만드는 과정이 긴밀하게 맞물려 있어서 서로 구별되지가 않는다.
이처럼 구별되지 않는 그림은 그리기와 만들기의 프로세스 중 한 프로세스가 그림의 외적 인상이며 처음인상을 장악하게 한다. 시트지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만들기 시작한 처음 작업에서는 그리기보다는 만들기가 화면에 대한 첫인상을 결정지었었다. 그리고 점차 만들기의 과정은 그리기의 과정에 자리를 내어주면서 그리기의 과정이 두드러져 보이기에 이른다. 그래서 그림은 외적으로 그린 그림이며 재현적인 그림처럼 보인다. 그리고 만드는 과정은 그리는 과정 밑으로 잠수한다. 그래서 그림은 꽤나 잘 그렸지만 특별할 것은 없는 그저 평범한 그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처럼 그리기와 만들기의 상호 이질적인 두 지층이 중첩되고 표면과 이면으로 분리되고 포개진다. 보통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보통의 그림이 아니다. 보통의 그림이 그림의 표면이라면 보통이 아닌 그림이 그림의 이면이다. 보통의 그림 속에 보통이 아닌 그림을 숨겨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숨겨진 그림은 드러나 보이는 그림이 주는 감각적 쾌감 탓에 잘 드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자세히 보면 보인다. 그리기와 만들기, 드러내기와 숨기기, 숨기기를 통해서 오히려 더 잘 드러나 보이게 하기의 과정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꽤나 복잡한 그림이다. 그저 평범한 보통의 그림처럼 보이는데, 알고 보면 형식이나 과정 자체가 그다지 복잡한 것은 아닌데, 형식으로나 의미론적으로, 그리고 형식보다는 의미론적으로 꽤나 복잡한 그림이다.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만드는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숨기는가. 숨기기를 통해서 오히려 더 잘 드러나 보이게 한다고 했다. 낯설게 하기다. 친숙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낯설게 하기의 전략을 숨겨놓고 있었다. 친숙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친숙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자세히 보면 낯설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자세히 보면 낯선 것이 보인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친숙한 것이 아닌 낯선 것을 보여주고 싶고, 그렇게 캐내진 낯 선 것이 다만 친숙한 것처럼 보일 뿐인 친숙한 것의 실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저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처럼 보이는데, 무엇이 표면이고 이면이란 말인가. 무엇이 실체란 말인가. 도시의 실체? 도시의 야경의 실체? 도시의 욕망의 실체? 도시와 욕망의 도시는 다르다. 도시가 가치중립적이고 중성적인 의미 없는 개념이라면, 욕망의 도시는 그 속에 파토스와 에토스를 탑재하고 있는 심리적이고 가치론적인 개념이다. 작가는 도시를 소재로 하여 바로 그 도시의 욕망을 그리고 싶고, 도시의 심부에 잠자고 있는 파토스와 에토스에 이르고 싶고, 그 심리적이고 가치론적인 개념을 드러내고 싶다.
물신도시, 욕망의 도시. 현대인은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현대인은 늙었다. 늙는다는 것은 상실을 엄연한 현실로, 삶의 냉엄한 준칙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님 당연하게도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 그렇고 심신이 편안할수록 더 피폐해진다. 처음엔 거머쥐려고도 해보았고 저항도 해보았고 몸부림도 쳐보았다. 그리고 이내 시들해졌다. 현대는 그렇게 시들해진 상실감이 침묵보다 깊은 잠속에 잠복해있다. 철저하게 무기력하지만 현실을 개조하고 전복할 수도 있는, 거의 그럴 일은 없는,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한 동력이며 계기이기도 하다. 상실감은 숨어있지도 않다. 일부러 외면하지 않는다면 쉽게 눈에 띈다.
여기에 상실의 시대에 역행하는, 일부로나 실제로 상실감을 외면하는, 상실감이 사실은 거짓이라고 말해주는, 유혹하듯 속삭이는 장소가 있다. 도시다. 현대 속의 현대다. 현대도시는 신을 폐기하고 자본주의 물신을 대리신으로 불러들였다. 그런 도시에서 모든 길은 물신으로 통한다. 물신이 아니라면 아무런 일도 시작되지도 일어나지도 않는다. 스펙터클 소사이어티. 현실 속에 영화가 있고 소설이 이미 다 들어있다. 현실 속의 영화와 영화 속의 현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꿈꾸듯 삶을 살게 만들어라.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고 이미지가 현실인 시대를 구가하게 하라. 물신의 지상명령이다. 현실을 이미지로 바꾼다는 것은 곧 현실을 소비할 수 있는 상품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이미지가 현실을 대신하는, 이미지가 곧 현실인 장소가 도시다. 그리고 그 현실은 낮보다는 밤에 더 잘 드러나 보인다. 낮보다는 밤에 도시는 더 도시답다. 현실과 이미지가 뒤죽박죽된, 현실보다 이미지가 더 현실처럼 와 닿는 도시의 야경 속에서 현대인은 기꺼이 길을 잃는다. 도시에는 길이 없고 오로지 이미지의 밑도 끝도 없는 흐름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이미지 도시를 판타스틱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조명이고 인공 광이다. 조명은 물신의 화신처럼 물신이 흘려보낸 기처럼 도시 구석구석을 핥고 다닌다. 때론 어둠 속에 침잠하고 싶은 사람들이며 고독하고 싶은 사람들마저 지나치는 법이 없고 내버려두는 법이 없다. 도시 속에 입성했으면 도시의 법률이며 준칙을 받아들여야 한다. 도시 속에 고독과 침잠과 상실감에 젖은 감상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래서 박상희는 도시를 그리고 도시의 야경을 그린다. 도시에 끌려서 도시를 그리고 도시가 애써 지워낸 상실감을 들추어내고 싶어서 도시의 야경을 그린다.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이중성과 양가성은 도시 자체의 속성이기도 하고(현란한 불빛 속에 상실감을 은폐하고 있는) 도시에 대한 작가의 태도이기도 하고(환락도시와 상실의 도시라는 중의적 의미로 나타난) 도시를 재현하고 있는 시트지 고유의 성질이기도 하다. 고유의 성질? 시트지에 고유성 같은, 본질 같은, 거대담론 같은 어떤 항상적이고 일관된 성질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그저 임시방편의 쓰임새가 있을 뿐. 작가는 원래 이 임시방편의 쓰임새를 간판을 그리면서부터 착안해냈었다. 도시를 도시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도시의 아이콘으로 부를 만한 것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하고 숙고하는 과정에서 찾아진 것이 간판이다. 그리고 그렇게 간판을 그리다가 자연스레 간판의 재료인 시트지와 빛(조명빨)이 눈에 들어왔다. 간판은 도시의 전형에 해당하는 아이콘이고, 그 아이콘은 조명으로 인해 더 잘 드러나 보인다. 그래서 시트지로 그림을 그리게 됐고 도시의 야경을 그리기에 이른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계급론에 의하면, 문화는 만인에 평등하지도 균등하지도 않다. 이로부터 사물계급론을 유추해볼 수가 있을 것이다. 비록 모든 계층과 부류의 사람들이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시기 때문에 코카콜라를 그린다는 앤디 워홀의 애교 섞인 전언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사물은 결코 만인에게 평등하지도 균등하지도 않다. 빛도 마찬가지. 빛도 물신이 분배하는 자본의 논리로부터 예외일 수도 자유로울 수도 없다. 비록 자연광은 만인에 평등하고 균등한 빛을 비출지 모르나,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조명빨은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를 수행하고 대리하고 반영한다. 빛에도 분명 그레이드가 있다.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현란한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는 빛이 있는가 하면, 그 빛의 기세에 짓눌려 희미한 조도 아래 궁색한 몸을 낮추는 빛 같지도 않은 빛도 있다. 조명은 심지어 사람들이 도시를 빠져나간 이후에조차 밤을 잊은 그대들을 위해 저 홀로 번쩍거리고 점멸하고 자기를 광고하기에 열심이다.
자연광이 사물을 부드럽게 감싼다면 인공광은 사물의 대비를 극명하게 한다. 사물을 빛과 어둠으로, 선한 사물과 악한 사물로 대비시킨다. 그 날카로운 예각에 찔리거나 베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물신의 사제 앞에 한껏 몸을 사려야 한다. 예로부터 빛은 신의 전유물이며 부유물이었다. 자본주의 물신이 그 성스러운 빛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파리하고 창백한, 차갑고 무미건조한 빛이 유리 진열장에 모신 상품들을 얼마나 돋보이게 하는가. 노터치. 더럽혀진 손으로 성스러운 몸(상품 혹은 물신)을 만지지 말라. 예로부터 성과 속은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다만 주인이 바뀌었을 뿐. 일을 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고, 일을 할 수 없는 자도 먹지 말고,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자도 먹지 말라. 물신은 신격도 아니고 인격도 아니다. 그래서 마치 기계처럼 여지가 없다. 그저 작동과 수행이 있을 뿐. 이처럼 도시의 야경을 휘황찬란하게 하는 빛은 냉정하고 동정이 없다. 박상희는 도시의 야경을 불 밝히고 있는 조명을 매개로 이처럼 냉정하고 동정이 없는 자본주의 물신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최소한 그리고 싶은지도 모를 일이다.
박상희의 그림은 그림 층과 시트지로 오려낸 층이 하나의 층위로 중첩돼 있다. 외적 인상과는 달리 자세히 보면 이 두 지층은 서로 일치하지도 조화를 이루지도 않는다. 시트지 층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재현된 그림 층을 돋보이게 하기보다는 해체하고 파열한다. 그렇게 파열된 현실의 지층 사이로 무엇이 보이는가. 작가는 시트지를 매개로 표면만 있고 이면은 없는 현대도시의 무미건조하고 창백한 혹은 무색무취의 속성을 드러내고, 그 매끈한 피부를 듬성듬성 오려내 현대도시의 속살을 드러내 보인다. 그렇게 오려낸 표면 뒤쪽으로 이면이 보이는가. 꽤나 잘 그리고 그럴듯하게 그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게 숨겨져 있어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이런 물음 앞에 서게 만든다. 현대도시는 이면이 있는가. 빛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현대도시가 빛의 휘장 뒤편으로 숨겨놓고 있는 어둠을 직시한다면 혹 그 이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