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윤 기자 2013.05
어둠 속에서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들, 다국적인 언어가 적힌 간판들과 이들에게 몸을 내주고 있는 건물들은 언뜻보면 아크릴 물감이 깔끔한 층을 이루는 단순 명료한 회화로 보인다. 그러나 박상희의 회화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물감이 아닌 시트지이다. 작가는 이를 구현하기 위해 앞서 이미지에 따라 색상을 결정해 해당하는 시트지를 캔버스에 붙이고 칼로 오려낸 후, 시트지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을 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여기서 시트지라는 매체는 도시를 가린 거대한 장막처럼 하늘하늘 화면 위를 배회한다. 원근감에 입각한 이미지들이 조각적으로 분산되는데, 이들은 단순한 이미지로 읽히지 않는다. 시트지에 의해서 캔버스 위에 막이 생기고 그 막에 의해서 캔버스에 나타난 이미지에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다.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실감을 느끼게 하는 장치로써의 시트지.
관람객이 작가가 만든 환영의 밀궁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회화의 기능이라면, 작가 박상희의 작품들은 그 환영에서 현실로 관객을 끌어 올리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야경들을 포착하기 이전, 만화나 영화 그리고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간판의 이미지들을 캔버스로 옮겼다. 이 때 만화에서 명암이나 패턴을 입힐 때 쓰이는 만화용품 스크린 톤을 사용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A3 사이즈 이상으로는 제작되지 않는 스크린 톤의 특성상, 작품 크기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박상희는 직접 대형 스크린 톤을 제작하기에 이르렀고, 거대한 시트지를 원하는 패턴으로 잘라 작품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처음 작가가 시트지를 사용하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박상희의 작품세계가 그 영역을 넓혀감에 따라 근본적으로 뿌리를 두었던 만화와 상업영화 그리고 간판의 이미지들은 현재, 도시의 밤으로 주 무대가 옮겨졌다. 그러면 작가가 그토록 도시의 야경에 애착을 보이는 이유는 무었일까. 밤은 세상 만물이 잠들 시간, 억눌렸던 자아들이 해방되며 더 없이 생기넘치는 장소로 변모한다. 뿐만 아니라 이 도시의 밤을 장식하는 간판들은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욕망에 대한 구현이자 바로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작가는 어찌보면 어둡고 딱딱해 보일 수도 있는 이미지들의 외곽선을 흐트러뜨리고 자유롭게 변형시키며 정체된 장면의 이미지가 아닌 호흡이 느껴지는 이미지들을 생산해 낸다. 도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순전히 기능적인 의미에서 만들어진 무미건조한 이미지들, 횡단보도에도 미학적인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바위에 붙어있는 조개껍질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간판들은 한 사회와 그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데 이를 전체적으로 바라 볼 때에는 일종의 문화적 유전자 지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천이 가지고 있는 역사, 서구 열강에 의해서 개방을 하면서 형성되는 청국 조계, 일본 조계 들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그런 문화들이 잔존해 있는 장면들을 목격하던 박상희는 외국의 야경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인천과 동일한 경험을 지닌 타문화권의 도시들, 홍콩과 요코하마의 야경이 바로 그것이다. 세 도시가 모두 거의 동일한 시기에 같은 일들을 겪은 것이다. 서구적인 문화와 기존의 토착 문화, 도시의 속성, 도시가 욕망하는 것들 모두가 인간의 욕심과 본심에 의해 한 데 섞여있다.
그런 작가가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작업은 자신만의 작은 미니어쳐 도시, 풍경을 만들어 이를 프레임 안에 담아 내는 것이다. 그 밖에도 기존의 얇은 시트지 위에 두께를 더해 보다 부조적인 성향을 강조하고 아크릴이 아닌 유화 물감과 유성 안료를 섞어 기존의 작품들 보다 더 유기적인 감각을 더해보려 계획중이다.
작가 박상희가 바라보고 있는 도시의 야경들은 관광지 엽서에 나올 법한 심미적으로 아름답기만 한 텅빈 장면들은 아니다. 인간의 희로애락과 자멸적인 욕망이 2차원과 3차원의 경계에 걸쳐져 있다. 작가는 관찰자적인 냉철한 시선으로 모든 문화의 정수를 품고 있는 도시의 야경을 응시하고, 표본이나 데이터를 수집하는 과학자처럼 시트지의 얇은 막 위 이 모든 장면들을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