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희 개인전>에 관한 단상
작가는 끊임없이 외부의 기대를 마주한다. 그리고 그 외재적 요구에 부응하는 창작을 하며 내재적으로 자신의 위치와 좌표를 새로이 설정하기 위한 실천과 실험, 그러니까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해야만 한다.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며 토해낸 작품은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평가시스템의 한가운데서 이리 치이고 저리 깨질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 즉, 작가라는 존재는 자신의 생각과 발언을 미술의 형식으로 구현하고, 그것을 곧 전시라는 공론장에 내비쳐야만 하는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작품을 통해 작가 자신을 증명해야 함은 당연하지만, 그것은 구석진 방 한편에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언제나 공론의 장에 자신을 기꺼이 던져 여러 관점에서 해부당할 각오를 해야만 한다. 이쯤 되면 외로운 싸움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대다수의 관객은 표피의 차원에 머무르는 유희적 감상에 익숙하고, 작가의 내적 고민과 갈등은 전시의 오픈과 함께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허무하기 이를 데 없는 감정으로 치닫기 일쑤이다. 그렇게 전시는 열리고 막을 내리길 반복하며, 해마다 공모에 지원하여 기금을 타고 그다음 전시를 준비하는 것이 작가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 년 이년이 지나고 나면 그 허무해진 감정은 극을 향해 치닫거나, 혹은 그냥 그렇게 익숙해진 관성적 삶의 루틴으로 받아들기에 십상이다. 박상희의 전시는 작가의(또는 자신의) 이런 고된 삶에 내포한 정서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전시장에서 관객을 처음 반기는 작품은 라이트 박스 위 트레싱지에 묘사된 구르기를 하는 인물 드로잉이다. 그리고 공간의 가운데로 향하는 통로를 따라 검은색 테이프가 이어져 있다. 자세히 보면 이 위에는 앞선 작품과 비슷하게도 구르기를 하는, 하지만 몇 번이고 중심을 잡으며 같은 행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인물이 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인물로 시작하는 이 전시는 어두침침한 조도 탓인지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는 이 이미지에 비장함을 더하고 있다.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그리 크지 않은 전시장을 빼곡히 채운 이미지가 종잡을 수 없는 분위기를 조장하며 전시의 초입에서 떠올릴 수 있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선사한다. 많은 수의 조명은 조각조각 나뉘어 공간을 채운 캔버스들을 비추고 있고, 각 캔버스 위의 이미지는 어떤 재현된 풍경을 온전히 담아내는 듯하다가도 이내 공간을 수놓은 다른 이미지와 충돌하고 다른 여타의 회화적인 요소와 반응하며 재현해낸 이미지로 담아낼 수 없는 어떤 지점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져 내리길 반복한다. 심지어 박상희의 기존 작업을 아는 이들에게 전시의 이러한 이미지는 다소 낯설 것이다. 누군가는 그녀를 다소 정직하게 도시의 풍경, 불빛이 산란하는 밤의 도시를 화폭으로 옮겨내는 작가로 기억할지도 모르며, 자본주의 시대 과잉 생산된 상품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욕망을 재현하는 작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른 회화작가로부터 박상희를 분리하는 요소는 전통적 회화에서는 생경한 시트지 컷팅이라는 재료와 기법을 화면 위에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독특한 방법론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업은 익숙하고 보편적인 회화의 범주 안에 온건하게 위치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캔버스라는 사각의 공간을 거스르지 않으며, 종종 회화에서 익숙한 풍경의 대상을 다루고 그 재현에 충실하듯이 말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충분한 재현에 도달하기 이전, 그녀에게 주어진 여러 회화적 요소의 실험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작품의 물리적 지지체이자 백그라운드인 전시 공간의 적극적인 변용, 캔버스와 캔버스 사이 여백의 리드미컬한 전용, 강박적으로 세팅한 무수한 조명의 활용 등은 재현을 통해 획득하는 구체적인 시각 이미지로부터 감각적인 거리감을 확보하도록 한다. 우선 공간을 차지한 각 작품은 캔버스로 구별된 재현된 이미지이기 이전에 최소한의 사각 틀을 벗어나 벽으로까지 연장됨으로 이미지의 확장성에 대한 논의를 일으키고, 벽과 캔버스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확산과 수렴을 반복하는 이미지들의 충동이 만들어내는 심상이다. 검은 밤의 도시 풍경(Hongik University Street (Park Jun Hair Salon), 2008)은 구체적인 시공의 설명보다는 확산하고 절멸하는 빛의 감각으로 치환되고, 녹색의 풍경(Amusement Park)은 반복적인 패턴과 형태로 치환되고 캔버스 너머의 배경(전시 공간)으로 확장함으로써 소멸된 장소성에 내재하는 감각으로 추상화된다. 이 두 벽을 마주하고 있는 또 다른 벽면 역시 이와 비슷한 적극적 공간 활용의 속내를 비치고 있다. 온통 분홍색으로 칠해진 이 벽은 조명에 의해 같은 색 안에서도 다른 표면의 이질감으로 생동한다. 자세히 보면 이전의 작업에서 산란하는 빛이나 재료적 실험 차원에서 사용하던 시트지를 하나의 색이자 면으로 치환하여 공간의 일부를 덮고, (색은 같지만 다른 성질인) 물감의 분홍색과 충돌시키며, 조명을 적극적으로 반사하여 은연중에 물질성을 가시화함으로 벽면 위에서 드문드문 형상을 드러내는 이미지에 물질적 차원의 특별한 레이어를 형성한다. 가장 최근의 작품인 <Flowers and a Bird>(2019), <Still Life-Pink>(2019)는 확장된 벽화 형식을 취한 앞선 작품들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보여준다. 가벽 위에 정직하게 걸린, 일견 모노톤의 회화로 보이는 이들은 시선의 각도에 따라 어떤 형체를 흐릿하게 드러낸다. 이 어스름한 이미지는 작가의 회화에서 주요한 재료로 다루어졌던 시트지의 매끄러운 표면과 빛의 마주침, 그리고 얇은 두께가 만들어내는 미세한 깊이에서 기인한다. 가까이 다가서 본다면 그리 복잡하지 않은 정물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이 회화는 재료에 대한 섬세한 접근을 통해 단조로운 색감과 말 없는 사물의 위치에서 벗어나 투명하고 얇은 표면에 잠들어 있던 다층적 감각을 일깨운다. 여기에 더해 이 작품들의 사이사이 위치한 검은색의 스퀘어는 재현 대상이 부재한 공백에서 시작하여 마치 문장의 구두점과 같이 회화의 경계를 구분하는 동시에 벽면에 정갈하게 자리 잡은 회화에 대비되는 색채로 묘한 호흡과 리듬감까지도 만들어내고 있다. 이렇듯 재현을 위한 회화에서 탈주한 형식적 실험은 자신의 지난 회화에서 시작하여 해체 및 재구성, 확장함으로 박상희에게만 가능한 회화적 실험이자 언어적 가능성을 허락하게 되었다.
다시 전시의 초입으로 돌아와 보자. 이쯤 되어 우리는 이 구르는 인물이, 그리고 구르기라는 수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인물은 작가 자신을 포함하여 같은 고민을 가진 작가 일반을 상징할 것이며, 구르기라는 행위와 반복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계속 재주를 넘어야 하는 창작자의 지난한 수행 과정을 의미할 것이다. 작가와의 대화 말미에 그녀는 이 구르기가 기왕이면 앞으로 향하는 것이었으면 하였다. 사실 그 방향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렇게 수행을 지속하는 창작자에게, 그리고 수행의 목적 그 자체로부터 우리는 지금의 예술에 관한 논의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정해진 방향은 없다. 설령 그것이 앞이 아닌 뒤라 할지라도 구르는 과정에서 부단히도 균형과 밸런스를 잡아가려는 그 순간에 의미는 이미 존재할 것이다. / 김성우 (독립큐레이터)